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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의 은혜

God Is So Good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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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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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Is So Good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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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주기도문의 말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마태복음 6:12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다가 문득 영화 《밀양》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에서 신애는 사랑하는 아들을 유괴와 살인으로 잃습니다. 깊은 절망 가운데 있던 그녀는 교회를 만나고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말을 듣습니다. 살인범은 자신도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며, 이미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신애는 무너집니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 사람을 용서했습니까?” “내 아이를 죽인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영화 속 인물의 질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비슷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는 근거는 피해자의 허락이나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한일서 1:7 그러나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사람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 누가복음 19:8 참된 회개에는 회개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드리러 왔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영화 속 살인범이 정말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깨달았다면 신애에게 단지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과 당신의 아이에게 저지른 일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은혜를 받은 사람의 모습에 더 가까웠을 것입니다. 동시에 신애의 모습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애는 살인범을 용서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나는 이제 내 아들을 죽인 사람까지 용서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었다.” 라는 자기 의가 조금은 섞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가지고 갔던 “내가 당신을 용서하겠다”는 역할이 사라졌고, 그것과 함께 자신의 믿음까지 흔들린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의 반응에 따라 나와 하나님의 관계까지 흔들린다면, 나는 하나님 자체보다 내가 행한 용서와 나의 신앙적인 모습을 붙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애를 정죄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상처를 누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욥도 하나님께 질문했고, 예레미야도 탄식했으며, 시편 기자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쳤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묵상 가운데 마태복음 18장의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종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모두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밖으로 나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네가 받은 상처는 작다”는 뜻이 아닙니다. 백 데나리온도 결코 작은 빚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식을 잃은 아픔을 백 데나리온에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네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작은지를 보지 말고, 네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일만 달란트와 같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값을 대신 치르셨고, 우리는 값없이 용서받았습니다. 그래서 진짜 용서는 “나는 신앙인이니까 용서해야 한다.” 또는 “나는 이런 사람까지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는 자기 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나 역시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고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용서하셨다.” 라는 은혜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용서와 화해도 구별해야 합니다. 용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복수와 심판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화해는 두 사람이 함께 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진정한 회개와 책임이 필요합니다. 용서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다시 신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이 곡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해서 사랑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용서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의 길을 걸어갑니다. 상대방이 회개하든 하지 않든, 사과하든 하지 않든, 그 사람의 태도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믿음의 근거는 상대방의 반응이 아니라,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이 곡의 중심 고백은 한 문장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은혜를 받은 나, 오늘도 백 데나리온을 주의 손에 맡깁니다.” 이 곡은 바로 그 묵상과 질문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