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지혜 #487] 800개 언어를 하나로 묶는 흙구장의 럭비공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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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지혜 #487] 800개 언어를 하나로 묶는 흙구장의 럭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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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파푸아뉴기니 프로 럭비팀 창단에 6억 호주달러 지원…
태평양에서 스포츠가 곧 안보가 되는 시대
파푸아뉴기니의 수도 포트모르즈비 한복판에는 잔디보다 흙이 더 많은 경기장이 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아이들은 시든 풀 사이에서 병뚜껑과 쓰레기, 뾰족한 자갈을 손으로 주워 냅니다. 흘러내리는 바지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유니폼, 발보다 큰 축구화를 신은 10세 이하 선수들이지만 준결승전에 임하는 표정은 진지합니다. 한 팀 선수의 테이핑한 손등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빌립보서 4장 13절이 마커로 적혀 있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 국제판이 최근 전한 파푸아뉴기니 럭비 리그(Rugby League) 현장의 모습입니다.
파푸아뉴기니는 800개가 넘는 언어와 그보다 많은 부족으로 나뉜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하나로 묶는 몇 안 되는 끈이 럭비 리그입니다. 럭비 리그는 1890년대 럭비 유니온에서 갈라져 나온, 보다 격렬한 형태의 경기로 1930년대 호주 금광 광부들을 통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이후 럭비는 부족의 경계를 넘는 국민적 열정이 되었습니다. 현지에서는 럭비를 종교에 빗대어 말할 정도이며, 한 선수의 어머니는 "파푸아뉴기니의 심장은 럭비"라고 표현했습니다. 아이들은 공이 없으면 풀을 채운 플라스틱 병이나 신문지를 넣은 쌀자루로 경기를 하고, 정전으로 중계 화면이 꺼지면 텔레비전 앞의 군중이 함께 탄식합니다.
호주는 바로 이 열정에 주목했습니다. 호주는 파푸아뉴기니가 호주 최상위 프로 리그인 국립 럭비 리그(NRL)에 자국 팀을 창단할 수 있도록 6억 호주달러, 미화로 약 4억 3천만 달러(약 6,000억 원)를 지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새 팀 '파푸아뉴기니 치프스'는 2028년 리그 데뷔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호주 당국자들에 따르면 파푸아뉴기니가 중국과 안보 협정을 맺을 경우 지원금이 회수되고 팀이 해체될 수 있다는 조항이 계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호주 당국자는 계약이 제안될 무렵 파푸아뉴기니가 중국과의 치안 협정 체결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파푸아뉴기니는 호주에서 북쪽으로 약 160km 거리에 있는 이웃 나라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은 이 지역에서 인프라 사업에 투자하고, 치안 지원을 제공하며, 새 학교를 지어 주었습니다. 호주의 선택은 총이나 차관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얻는 방식, 곧 소프트 파워(Soft Power) 전략입니다. 한 호주 당국자는 어떤 파푸아뉴기니 정치인도 이 계약을 위태롭게 만들지 못할 것이라며, 이를 뉴욕 시장이 뉴욕 양키스를 없애 버리는 일에 비유했습니다. 국민이 사랑하는 팀을 볼모로 삼은 셈이니 냉정한 계산이라 할 수 있지만, 동맹과 영향권을 지키는 일이 원래 그러한 것입니다.
제임스 마라페 총리는 팀 창단을 부족 간 폭력을 줄이고 민족 갈등을 완화하는 국가 통합 전략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 정책이 끝난 뒤 1995년 럭비 월드컵 우승으로 흑인과 백인 국민이 하나가 되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반면 야당은 도로와 상수도, 보건 의료 같은 기본 시설이 부족한 형편에서 스포츠팀에 돈을 쓰는 것은 '빵과 서커스'식 정책이라고 비판합니다. 두 아들을 럭비팀에 보낸 한 어머니도 정부가 교육과 보건에 투자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럭비가 범죄와 폭력에 빠지기 쉬운 청소년들을 붙잡아 준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 비판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파푸아뉴기니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약 3,000달러(약 420만 원)에 불과하고, 국민의 40%가 빈곤선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인구의 3분의 1이 15세 이하입니다. 21세 청년 알렉스 엔디는 아버지가 실직하면서 기계공이 되는 공부를 그만두었고, 지금은 친구와 함께 길가에서 개당 약 25센트(약 350원)짜리 소시지와 빈랑 열매, 약 1.50달러(약 2,100원)짜리 양고기를 팔며 하루를 보냅니다. 억대 연봉을 받게 될 프로 선수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 투자가 단순한 구경거리에 그치지 않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지원금의 일부는 유망주를 발굴하는 아카데미에 쓰입니다. 3년째 청소년 프로그램을 이끌어 온 호주인 코치 조이 그리마는 수백 명 가운데 프로 무대에 서는 아이는 소수이겠지만, 모두가 규율과 생활 기술을 배우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학교 등록을 참가 조건으로 삼고 있으며, 학업을 중단했던 선수 18명이 지난해 다시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파푸아뉴기니는 역내에서 학업 유지율이 가장 낮은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풀뿌리 리그를 만든 전직 프로 선수 스탠리 올로의 말처럼 이 아이들에게는 속도와 힘이 있으며, 부족한 것은 규율과 기술입니다.
여성들의 변화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여자 국가대표 출신 안젤리카 나네게는 10대 시절 고원 지대에서 럭비를 시작했다가 남성들로부터 돌과 물병 세례를 받으며 "집에 가서 밥이나 하라"는 조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고, 이제는 같은 남성들이 경기장에서 그들을 응원합니다.
우리 시니어 세대는 이 장면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하던 시절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공을 차던 기억,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에서 온 국민이 하나 되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포츠가 도로와 병원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공동체에 소속감과 질서를 심어 주고, 청소년에게 땀의 가치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결코 헛된 투자가 아닙니다. 동시에 이 사례는 오늘날 안보가 군함과 협정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웃의 마음을 얻는 나라가 결국 이웃을 지킵니다.
그날 펑키 샤크스는 8대 6으로 졌고,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정착촌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그날 오후에도 다시 럭비공을 들고 뛰었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미래는 거창한 계약서보다 그 흙길 위의 끈기에서 자라나는 법입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