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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장. 베들레헴에서, 한 농부의 집과 성탄의 동굴에서; 하느님은 왜 원한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으실까? 하.사.시. 성경공부, 전삼용 요셉 신부

순전한 가톨릭(전삼용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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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장. 베들레헴에서, 한 농부의 집과 성탄의 동굴에서; 하느님은 왜 원한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으실까? 하.사.시. 성경공부,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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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장. 베들레헴에서, 한 농부의 집과 성탄의 동굴에서 하느님은 왜 원한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으실까? 베들레헴의 농부가 저녁상에서 손님을 내쫓습니다. "썩 나가시오! 그대, 이 거짓 메시아를 따르는 자여." 유다가 농부의 옷을 움켜쥐자 예수님이 이르십니다. "가자, 유다. 맞서지 마라. 그의 앙심 속에 그를 두고 가자. 하느님께서는 원한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으신다." 그러고는 몇 걸음 뒤 무너진 담벼락 틈의 동굴로 들어가십니다. 박쥐가 파닥이고 짐승 배설물이 덮인 악취 나는 굴입니다. "들어가거라. 여기가 이스라엘 임금이 태어난 방이다." 악취 나는 굴에는 들어가시고 원한이 있는 집에는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들어가실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들어가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유를 폭력으로 꺾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까닭이 왜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법칙에서 나오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마구간과 구유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성경의 이야기로 봅니다. 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1권 제73장으로 들어갑니다. 라헬의 무덤가 우물부터 봅니다. 물 긷는 여인이 서른 해 전 그 밤의 목자들과 아기를 저주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물동이 열 번을 대신 날라 주시고 그 집 밥상에 앉으십니다. 농부가 헤로데의 학살을 이야기하며 말합니다. "그 주인이 두렵지만 않다면 지금이라도 죽일 거요." 예수님은 밥상에서 야곱의 별과 이사이의 새싹과 라헬의 울음을 풀어 주시고 "미워하지 마시오.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시오. 그대들의 마음에서 미움이 떨어져 나갈 때 메시아께서 오실 것이오" 하십니다. 그러자 쫓겨나십니다. 예언을 풀어 주신 분이, 물동이를 열 번 날라 주신 분이 문밖으로 내쳐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을 다시 밀고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다음은 문 앞에 서서 두드리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문을 부수고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묵시록 3장 20절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두드리시고 기다리십니다. 열면 들어가시고 열지 않으면 문밖에 계십니다. 엠마오의 저녁이 그 모습입니다. 루카 복음 24장 28절부터 29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붙들지 않았다면 더 멀리 가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청하는 집에 들어가시지 당신 발로 밀고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을 두고 우시며 하신 말씀도 그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37절입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하느님이 모으려 하셨는데 사람이 마다했고, 마다한 사람을 하느님은 끌어다 날개 밑에 넣지 않으셨습니다. 나자렛에서는 더 놀라운 말이 적혔습니다. 마르코 복음 6장 5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전능하신 분이 할 수 없으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문을 그분이 부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왜 부수지 않으시는가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그 사람을 그 사람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집회서 15장 14절부터 15절입니다. "한처음에 인간을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신명기 30장 19절입니다.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앞에 내놓으시고 선택하라 하십니다. 대신 골라 주지 않으십니다. 만일 사람의 뜻과 상관없이 들어가신다면, 누구는 미리 구원으로 누구는 미리 멸망으로 정해 두셨다는 예정설이 말하듯 그리하신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으시는 것이고, 그 순간 요한 1서 4장 8절의 법칙이 깨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제하지 않습니다. 강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입니다. 그래서 원한이 있는 집에 들어가지 않으시는 것은 그분이 약해서도 그 집을 미워해서도 아니고, 그 집 주인의 자유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들어가시는 조건을 그분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23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사랑하면 가서 사십니다. 원한은 그 사랑의 자리에 들어앉은 다른 주인이고, 그분은 다른 주인이 있는 집에 억지로 드시지 않습니다. 69회차에서 들은 말씀 그대로입니다. "나는 내가 너에게 준 자유에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다음은 잿더미를 바라는 제자입니다. 유다가 터뜨립니다. "어찌하여 저 모독자를 진흙탕에 처박아 무릎 꿇리지 않으십니까? 기적으로 잿더미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마을에서 두 형제가 하늘의 불을 청했을 때 꾸짖으신 그분이 답하십니다. "나는 창조하러 왔다. 부수러 오지 않았다." 들어가지 않으시는 분은 부수지도 않으십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과 문을 부수고 불을 내리는 것은 같은 폭력입니다. 자유를 존중하시는 분은 원한의 집을 떠나시되 그 집을 태우지 않으시고, 그 집 주인이 어느 날 문을 열 때까지 문밖에 계십니다. 그 밤 요한이 울었고, 예수님은 그 울음에 당신 복음서의 첫 장을 미리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1절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맞아들이지 않았다고만 적혔습니다. 그래서 태우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음은 마구간과 구유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들어가실 수 있는 집은 어떤 집입니까. 달빛 아래 폐허의 동굴에서 예수님이 답하십니다. "바로 여기서 동정녀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 저 박쥐들은 아기의 첫 노리개였던 박쥐들의 딸의 딸들이다. 저 거미줄은 내 임금다운 요람의 닫집이었다. 이 바닥은 짐승 배설물로 덮여 있으나 그분의 발로 거룩해진 바닥이다." 루카 복음 2장 7절입니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여관은 자리가 없다며 문을 닫았고 마구간은 문이 없어 열려 있었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먹이통입니다. 누가 오든 가리지 않고 받습니다. 이사야 1장 3절입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짐승의 집이 하느님의 집이 된 것은 그 집에 원한이 없고 닫힌 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 그것입니다. 자리가 없다는 여관이 아니라 누구나 들어오는 마구간, 아무도 가리지 않는 구유. 코린토 2서 6장 16절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 가운데에서 거닐리라." 그 성전이 처음에는 마구간이었습니다. 원한 하나 없이 겸손하게 누구나 맞아들이는 사람,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이 들어오시고, 그런 사람이 된 유다가 그 밤 배설물 덮인 바닥에 엎드려 외쳤습니다. "제 교만이 무너집니다. 저는 스승님을 있는 그대로 뵙습니다." 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바로 답하십니다. "그래. 나의 자비를 다 받아라!" 두드리시던 분이 열린 문으로 곧바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원한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으신다." "나는 창조하러 왔다. 부수러 오지 않았다." "여기가 이스라엘 임금이 태어난 방이다." 교회의 판단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600항은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을 두고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계획 안에 각 사람이 당신 은총에 자유로이 응답하는 것을 포함시키신다." 1980년대 폴란드는 소련의 그늘 아래 있는 공산당 체제였고, 1981년 12월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자유 노조 연대를 불법화하고 수천 명을 가두었습니다. 그 계엄 아래서 바르샤바의 젊은 사제 예지 포피에우슈코가 달마다 조국을 위한 미사를 드렸습니다. 수만 명이 모였고 강론은 방송을 타고 온 나라에 퍼졌는데, 그는 정권을 욕하는 대신 한 문장을 되풀이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미움에 미움으로 답하지 마십시오. 분노한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려 할 때마다 그 분노를 기도로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비밀경찰은 그의 집에 폭발물을 던지고 가짜 증거로 그를 구속했으며, 1984년 10월 19일 그를 길에서 납치하여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돌을 매달아 저수지에 던졌습니다. 서른일곱이었습니다. 장례에 오십만 명이 모였는데 폭력이 한 건도 없었습니다. 그가 평생 가르친 그대로였습니다. 다섯 해 뒤 폴란드는 피 흘리지 않고 그 체제를 벗어났고, 교회는 2010년 그를 순교자로 시복했습니다. 저를 죽일 사람들에게도 제 마음의 문을 원한으로 닫지 않은 사람, 그래서 하느님이 끝까지 머무신 마구간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내 집에서 하느님이 들어오시지 못하게 막는 원한 하나를 찾아 그 문을 여십시오. 그분은 두드리기만 하시지 부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자리가 없다는 여관이 아니라 아무도 가리지 않는 구유가 되어 보십시오. 거기가 그분이 태어나시는 자리입니다. 다음 회차 제74장 '베들레헴 여관에서, 그리고 안나의 집 폐허 위에서'에서는 서른 해 전 어머니를 내친 그 여관과, 동굴의 가족을 받아들였다가 모든 것을 잃은 안나의 집 폐허에 서시는 예수님을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