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도 없는데, 조선은 한여름에 얼음을 어떻게 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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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조선의 궁궐에 얼음이 들어옵니다. 냉장고도 없고 전기도 없던 시대입니다. 강물은 이미 따뜻해졌는데, 이 얼음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답은 겨울의 한강에 있습니다. 추울 때 강에서 잘라 낸 얼음을 창고에 넣어 두었다가, 더울 때 꺼낸 겁니다.
그런데 얼음을 남겨 둔다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하려면 문제가 생깁니다. 봄을 지나 여름까지 몇 달을 버텨야 합니다. 녹는 얼음을 계속 붙잡아 둘 수는 없죠. 그렇다면 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이용해서 녹는 속도를 늦췄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남긴 얼음은 누구에게 돌아갔을까요?
오늘은 얼음 한 덩어리가 강에서 궁궐까지 가는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얼음을 캐는 장소와 시기, 보관하는 재료, 나누어 쓰는 규칙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어긋나면, 겨울에 아무리 힘들게 얼음을 모아도 여름에는 남아 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한강으로 가야 합니다. 강이 얼었다고 바로 작업할 수 있었던 건 아닙니다. 동빙고의 얼음 채취를 설명한 기록에는 두께가 네 치 정도 된 뒤에 작업했다고 나옵니다. 오늘의 길이로 대략 십이 센티미터입니다. 얇은 얼음 대신 충분히 두꺼워진 얼음을 기다린 겁니다.
채취 장소도 따졌습니다. 동빙고에 넣을 얼음은 두모포와 저자도 사이에서 얻었습니다. 지금의 옥수동과 뚝섬 일대를 떠올리면 됩니다. 기록은 그 이유를 더러운 개천 물을 피하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얼음은 녹지 않게 지키는 것만큼, 처음 어디서 얻는지도 중요했던 물건입니다.
두꺼운 얼음을 자르고, 나를 만한 덩어리로 떼어 냅니다. 여기서 겨울 날씨는 작업의 조건이 됩니다. 따뜻한 겨울에 얼음이 단단해지지 않으면, 채취를 늦추거나 다시 강이 얼기를 기다렸습니다. 창고를 잘 만들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들어갈 얼음부터 확보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라에서는 추위를 기원하는 사한제도 지냈습니다. 지금 보면 얼음을 모으는 일과 제사가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겨울 추위가 부족하면 다음 여름의 공급까지 흔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얼음을 준비하는 일정은 사람의 계획과 자연의 조건이 함께 결정했습니다.
잘라 낸 얼음을 나를 때도 손이 많이 갔습니다. 무겁고 미끄러운 덩어리를 옮겨야 했으니까요. 용재총화에는 칡끈을 얼음에 묶고, 강변에 땔나무와 약을 준비한 모습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몸을 녹이고 다친 이를 돌볼 준비까지 필요했습니다. 여름의 시원함은 겨울의 고된 작업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일에는 군인과 얼음을 다루는 일꾼들이 동원됐습니다. 얼음이 자연에서 공짜로 생긴다고 해서, 여름의 얼음까지 공짜였던 것은 아닙니다. 잘라 내는 사람, 옮기는 사람, 창고를 고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재료와 식량도 들어갔습니다. 자연에서 얻은 물건을 오래 쓸 수 있게 만드는 데에는 비용이 들었습니다.
창고는 겨울에 얼음을 넣기 전부터 손봤습니다. 썩은 대들보와 서까래를 바꾸고, 무너진 담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구멍이 나고 비가 새는 창고에 얼음을 잔뜩 넣으면 어떨까요? 얼음을 더 가져오는 것보다 먼저, 보관할 공간을 제대로 준비해야 했던 겁니다.
또 한 가지를 미리 모았습니다. 갈대입니다. 빙고의 위아래와 사방을 갈대로 두껍게 덮었다는 설명이 남아 있습니다. 금속이나 귀한 보석이 아니라, 강가에서 베어 온 식물이었습니다. 이 평범한 재료가 왜 얼음을 오래 지키는 데 도움이 됐을까요?
뜨거운 바깥에서 차가운 얼음 쪽으로 열이 들어오면 얼음이 녹습니다. 따라서 보관의 핵심은 그 열이 들어오는 속도를 줄이는 것입니다. 갈대와 짚을 겹겹이 쌓으면 식물 줄기와 그 사이에 공기가 머뭅니다. 이런 층은 열이 빠르게 전달되는 것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얼음을 갈대로 덮었다고 새로운 얼음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차가움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있는 얼음이 바깥의 열을 덜 받도록 감싸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냉 가방에 얼음을 넣는 상황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얼음이 없으면 가방만으로 음료를 얼릴 수는 없죠.
얼음 자체의 성질도 중요합니다. 얼음은 녹으면서 주변의 열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일부가 녹는 동안에도 남은 얼음과 그 주변을 차갑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보관은 녹는 일을 완전히 없애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손실을 줄여, 필요한 계절까지 쓸 만큼 남겨 두는 일이었습니다.
갈대를 충분히 넣고 창고를 잘 관리하면 결과가 달라졌습니다. 용재총화에는 관리를 잘한 뒤 큰 행사에 얼음이 부족하지 않았고, 가을에도 남아 있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같은 강에서 얻은 얼음이라도, 보관하는 사람의 준비와 관리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이 달라졌던 겁니다.
얼음 창고라고 하면 경주의 석빙고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한양의 동빙고와 서빙고가 모두 그런 돌 건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두 빙고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석빙고는 지방의 얼음 저장 시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돌로 만든 석빙고에서는 공간 자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면 바깥보다 낮은 곳에 저장 공간이 있습니다. 지붕 위에는 두꺼운 흙이 덮여 있습니다. 땅과 흙의 층을 이용해 바깥의 급격한 온도 변화와 햇빛의 영향을 줄이도록 만든 것입니다.
안쪽 바닥은 평평하게만 만들지 않았습니다. 경사를 주고 물이 빠지는 길을 두었습니다. 얼음은 조금씩 녹으므로 물도 생깁니다. 그 물을 안에 계속 고이게 두지 않고 밖으로 빼낸 겁니다. 천장에는 환기 구멍도 있습니다. 저장 공간의 공기와 습기까지 고려한 구조였습니다.
그렇다고 여름의 빈 석빙고에 물을 넣으면 저절로 꽁꽁 얼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먼저 겨울 얼음을 넣어야 했습니다. 건물과 덮개는 그 얼음이 빨리 사라지지 않도록 도왔습니다. 나무 창고이든 돌 창고이든, 여름까지 이어지는 출발점은 겨울에 확보한 얼음이었습니다.
이제 여름이 되어 얼음을 꺼냅니다. 국가가 관리한 얼음은 용도와 공급 대상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동빙고의 얼음은 주로 나라의 제사에 쓰였습니다. 서빙고는 궁중과 관청, 일정한 관료들에게 공급했습니다. 궁궐에서 쓸 얼음을 맡는 내빙고도 따로 있었습니다. 같은 얼음이라도 가는 곳이 달랐던 겁니다.
더위를 식히는 용도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음식 보관, 제사와 상례처럼 차가운 상태가 필요한 일에도 사용했습니다. 세종 삼십일 년의 실록에는 더운 시기의 제사에 당상관 이상에게 얼음을 한 장씩 주자는 청을 받아들인 기록이 있습니다. 얼음은 먹고 마시는 즐거움에만 쓰인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높은 사람만 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한 가지 더 볼 부분이 있습니다. 얼음을 나누는 제도에는 병자와 죄수에게 공급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국가의 얼음이 쓰이는 범위가 궁궐과 높은 관료의 집에만 한정됐던 것은 아닙니다. 더위 속에서 사람을 돌보는 용도로도 들어갔습니다.
다만 제도상 공급 대상이 있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언제든 넉넉히 썼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개인이 필요할 때 냉장고 문을 열어 꺼내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얼마가 남았는지, 어디에 배정됐는지에 따라 사용이 달라졌습니다. 한여름의 얼음은 보관 기술과 배분 규칙이 함께 만든 물건이었습니다.
얼음을 쓰는 장면만 보면, 옛사람들의 보관 기술이 놀랍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강가의 일꾼들에게 같은 얼음은 다른 의미였습니다. 여름의 편리함을 위해 겨울의 추위를 견뎌야 했으니까요. 빙고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노동과 부담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숙종 십팔 년, 실록에는 도성 백성이 심하게 굶주리니 장빙미를 거두지 말자는 건의가 나옵니다. 장빙미는 얼음을 채취하고 저장하는 일꾼에게 줄 쌀입니다. 임금은 이를 허락했습니다. 여름에 얼음을 쓰는 일의 뒤에는, 겨울 작업을 위해 마련해야 할 쌀과 백성의 사정이 있었던 겁니다.
누구에게 얼음을 나눌지뿐 아니라, 그 일을 누가 감당할지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얼음이 자연에서 생겼어도 그것을 꺼내 쓸 때까지 사람의 수고가 계속 들어갔습니다. 재료를 모으고 건물을 고치는 일까지 합쳐 생각하면, 빙고는 창고 하나보다 훨씬 큰 운영 체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가면 민간에서 얼음을 사고파는 모습도 커집니다. 얼음의 수요와 공급 방식이 변한 것입니다. 국가에서 나누어 주는 얼음과 장사로 거래되는 얼음이 함께 놓입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누가 얼음을 구할 수 있는지도 달라지므로, 조선 오백 년을 하나의 풍경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냉장고도 없던 조선에서, 한여름의 얼음은 어디서 왔을까요? 겨울에 강에서 얻었습니다. 그리고 창고와 단열 재료, 관리하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 여름까지 이어졌습니다. 차가움을 새로 만드는 대신, 겨울에 얻은 얼음을 조금씩 잃으면서 남겨 둔 겁니다.
얼음을 가져오는 장소가 깨끗해야 했고, 충분히 두꺼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갈대로 열이 드는 속도를 늦추고, 창고를 수리하고, 남은 양을 관리했습니다. 돌로 만든 빙고에서는 땅과 흙, 배수와 환기까지 활용했습니다. 이 조건들이 함께 작동했기 때문에 더운 계절에도 얼음이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조선의 여름 얼음은 건물 하나의 신기한 비밀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자연의 겨울 추위, 보관에 대한 경험, 비용과 노동, 나누어 쓰는 제도가 연결된 결과였습니다. 시원한 한 덩어리 안에 몇 달의 준비가 들어 있었던 셈입니다.
다음에 한여름의 얼음을 보게 되면, 그 앞에 있었던 겨울 강과 일꾼들의 손도 떠올려 보세요. 차가운 물건 하나를 오래 남겨 두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과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