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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막부를 무너뜨린 적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뒤 왜 살려 두었을까?ㅣ역사인물도감

역사인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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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막부를 무너뜨린 적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뒤 왜 살려 두었을까?ㅣ역사인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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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이에야스 #세키가하라 #에도막부 1602년 여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에서 자기와 맞서 싸운 시마즈 집안에 땅을 한 뼘도 떼어 가지 않겠다는 문서를 보냈습니다. 같은 해, 싸우지도 않은 사타케 집안은 땅을 절반 넘게 잃고 북쪽 끝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긴 사람은 적과 편을 무엇으로 갈랐을까요. 편에 선 장수는 땅을 2배 넘게 받고 서쪽 멀리 떠났고, 맞선 모리는 서쪽 끝 두 지방만 남았습니다. 막부의 일을 도맡은 가신의 땅은 2만 2천 석이었습니다. 세키가하라 뒤 다이묘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졌는지를 석고와 거리로 따라갑니다. 그리고 260여 년 뒤, 그가 땅을 그대로 둔 사쓰마와 서쪽 끝에 남긴 조슈가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는 자리까지 갑니다. 자료를 찾다 보니, 사타케가 땅을 빼앗긴다는 통고를 받고 일주일 뒤 고향의 가신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더군요. 아직 얼마를 준다는 말이 없으니 틀림없이 적게 나올 것이라고 적었고, 70여 일 뒤 받은 영지 문서에는 정말로 땅의 크기가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 이런 사람들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놓치기 싫으시면 구독을 눌러 두세요. 00:00 1602년, 두 집안에 간 정반대의 문서 01:03 편에 섰다고 곁에 두지 않았다 06:21 1600년의 이에야스는 아직 남의 신하였다 11:51 인질로 자란 사람, 등을 돌린 가신들 16:49 모리, 우에스기, 시마즈, 사타케는 어떻게 됐나 23:10 가장 가까운 가신에게는 가장 작은 땅 28:19 쇼군이 된 뒤, 법과 마지막 자리 34:20 260여 년 뒤, 살려 둔 적이 돌아왔다 40:01 그는 왜 적을 살려 두었나 본 영상의 일부는 AI 기술을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 참고 자료 [ 남은 문서 ] 国立公文書館 — 『譜牒余録』 권9, 시마즈 앞 안도 서장 사본 (1602) 仙台市博物館 — 다테 마사무네 앞 영지 각서, 이른바 百万石のお墨付き (1600) 防府毛利報公会 — 모리 데루모토·히데나리 앞 도쿠가와 이에야스 기청문 (1600) 山口県文書館 — 毛利家文庫 「御奉書品々写」, 성 파각 명령 사본 (1615) 『史籍集覧』 — 武家諸法度 元和令 (1615) 『本光国師日記』 — 이에야스의 유언 (1616) [ 연구 ] 水戸市 — 『水戸市史』 中巻(一) 第十三章 「佐竹氏の秋田移封」 藤井讓治 — 「江戸幕府の地域把握について」 『福井県文書館研究紀要』 1 (2004) 北村太智 — 「芳春院江戸下向の再検討」 『加賀藩研究』 13 光成準治 — 『毛利輝元』 ミネルヴァ書房 (2016) 小和田哲男 — 「『一国一城令』はなかった!?」 城びと (2025) 鹿児島県歴史・美術センター黎明館 — 「関ヶ原の戦い」 平凡社 — 『改訂新版 世界大百科事典』 「長州藩」 彦根城博物館 — 「彦根藩」 島本町教育委員会 — 「史跡をたずねて」 高浜砲台跡 #도쿠가와이에야스 #세키가하라 #에도막부 #다이묘 #사쓰마 #조슈 #메이지유신 #전국시대 #일본사 #역사인물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