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입니다.] 2026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이병근 신부) 영흥 성당
병근병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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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입니다.] 2026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이병근 신부) 영흥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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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한 다섯 가지 묵상(연중 제19주간 목요일) - 성 폰시아노 교황과 성 히폴리토 사제, 순교자
https://blog.naver.com/daumez/2243772...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낯익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큰 빚을 탕감받은 종이
정작 자기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는 용서하지 못하고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천 년 전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첫째, 용서는 회복과 치유의 길을 여는 것입니다.
"나는 무슨 빚을 졌는지도 모르겠고, 참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으니 차라리 가두어 버리겠다"고 말하는 그 마음입니다. 상대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그의 사정을 들어 줄 마음의 여유도 없고, 그저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상대를 내 삶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참지 않고, 듣지 않고, 마음의 감옥에 가두어 버리면, 그 사람은 이제 아무것도 갚을 길이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상대를 벌하는 것 같지만, 실은 관계 자체를 완전히 닫아 버리는 일입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더 이상 회복의 길이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용서는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자녀들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그 한 문장을 매일 입술로 바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마음을 열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용서는 우리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용서라는 그 길이 얼마나 험한가가 아니라, 그 길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누구신가입니다. 그분께서 다정하게 이끄시든 준엄하게 이끄시든, 우리는 그 길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이끄시는 그분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힘겨운 숙제가 아니라, 이미 그분 품 안에서 안식을 얻은 사람으로서 담대히 내딛는 발걸음입니다.
우리는 용서할 줄 모를 때 가정이, 공동체가, 관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눈으로 직접 목격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무너짐 앞에서도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는 멈추지 않는 걸음입니다.
용서하고 난 뒤에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됩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이 어느 순간 다시 슬며시 고개를 들고, 미워하라는 신호가 자꾸만 우리 마음을 두드립니다. 여름철 모기처럼 쫓아내도 쫓아내도 다시 돌아오는 그 원한과 마주할 때, 우리는 용서란 한순간의 결심이 아니라 매일 다시 선택해야 하는 걸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하기를 멈출 때, 더 이상 용서하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상대를 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받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문을 닫아걸면, 그만큼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사랑 앞에 문을 닫아걸게 됩니다.
복음은 이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인은 다시 그 종을 불러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네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우리가 용서하기를 그칠 때, 곁에서 슬퍼하는 이들이 있고, 우리를 다시 불러 물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오늘 그 물음 앞에 조용히 서서, 우리에게 먼저 베풀어진 그 자비를 기억합시다.
넷째, 용서는 두 얼굴을 번갈아 보는 아름다운 전환입니다.
용서는 갑자기 마음을 다잡는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라봄에서 시작됩니다. 자비로우신 그분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정의롭기만 한 나 자신의 얼굴로 눈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 두 얼굴을 번갈아 보는 동안, 셈하던 마음은 조금씩 놓아주는 법을 익히고, 정의만 알던 마음은 자비를 배워 갑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데도, 마음은 스스로 방향을 바꿉니다.
그분의 얼굴에는 언제나 가엾이 여기심이 먼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얼굴에는 너무 자주 계산이 먼저 있습니다. 그분은 갚을 길 없는 빚조차 그냥 없애 주시는데, 우리는 얼마 되지 않는 빚 앞에서도 손을 놓지 못합니다. 이 어긋남을 가만히 바라볼 때, 우리 안에서 부끄러움이 조용히 일어나고, 그 부끄러움이 결국 우리를 자비로 데려갑니다.
그토록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서로를 감옥에 가두어 온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 드러납니다. 참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비참함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은 아닙니다. 그분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다섯째, 우리에게는 성모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완고하게 굳어 있어서, 오늘 우리가 나눈 이 모든 말씀도, 우리가 매일 바치는 이 기도도, 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이 굳은 마음을 향해 오십니다. 꾸짖으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으로 조용히 일깨워 주시러 오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용서받았는지,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낄 때에도, 성모님은 먼저 등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키셨듯이, 우리의 완고함 곁에도 끝까지 머물러 계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 어머니께 우리의 굳은 마음을 맡겨 드립시다.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는 사람만이, 비로소 그 작은 빚 하나를 놓아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성인은 성모님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당신의 보호하심은 영원하며, 당신의 전구는 생명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그 영원한 보호하심에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그 얼굴을 함께 맡겨 드립니다.
2026년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병근병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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