Перейти к содержимому

어찌 그러할 수 있나이까 (요3:1-17)_26년 10월 4일_주일

다움교회

0:00 / 0:00

어찌 그러할 수 있나이까 (요3:1-17)_26년 10월 4일_주일

37 просмотров · 2 нед. назад
다움교회
37 подписчиков
37 просмотров · 2 нед. назад
종교적·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깊은 밤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성취를 쌓았으나, 인간의 노력과 율법의 실천만으로는 영혼의 근원적인 불안과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찾아온 그에게 인간의 결심이 아닌 ‘위로부터의 거듭남’이라는 참된 생명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1. 거듭남은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요 3:3-8) 거듭남은 “내가 다시 잘해 보겠다”는 인간적 결단이나 도덕적 갱신이 아닙니다. 에스겔 36장의 약속처럼 성령께서 위로부터 새 생명을 부어 주셔야만 가능한 전적인 은혜의 역사입니다. 바람의 움직임을 사람이 제어할 수 없듯, 구원은 인간의 계획과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 속에 있습니다. 2. 구원의 길은 하나님이 세우신 십자가를 바라봄에 있습니다 (요 3:14-15)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보라’고 명하셨습니다(민 21장). 그들에게는 어떤 치료제나 인간적 자격도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길을 바라본 자는 누구나 살았듯,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3. 이 모든 은혜의 뿌리는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 3:16)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 이삭을 대신할 숫양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성부 하나님께는 성자 예수님을 대신할 대속물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자격 없는 세상을 향해 쏟아부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자기희생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17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비참한 삶의 한복판에 장막을 치셨습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실패하여 홀로 밤을 지새우는 자리일지라도 낙심치 마십시오. 임마누엘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오늘도 그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함께 살아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