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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무너지고 나흘 뒤, 한양이 전쟁을 알았다

역사의 뒷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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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무너지고 나흘 뒤, 한양이 전쟁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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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조선왕조실록, #부산진성, #동래성, #선조 1592년 5월 23일 저녁 가덕도에 봉수가 올랐고, 그 소식이 한양에 닿은 건 나흘 뒤였습니다. 그 아흔여섯 시간 동안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사라졌고, 조정은 전쟁이 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첫날의 조선 조정을 시각 단위로 따라갑니다. 📌 이 영상에서 다루는 내용 · 개전 당일, 부산진 첨사 정발은 절영도에 사냥을 나가 있었습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양쪽에 다 적힌 사실인데, 두 기록의 온도가 다릅니다 · 가덕도 응봉봉수가 올린 첫 보고는 "왜선 아흔 척 남짓". 실제로 온 배는 700척, 병력 18,700명이었습니다 · 부산진성은 반나절도 못 버텼습니다. 성 안에는 군사 800명과 민간인 1,000~2,000명이 함께 있었습니다 · 동래성에는 이름이 남은 보통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관노 철수와 매동, 향리 대송백과 소송백,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뜯어 던진 아낙들 · 2005년 부산 지하철 공사장에서 동래읍성 해자가 드러났고, 바닥에서 인골 81개체가 나왔습니다. 남자 59, 여자 21, 그리고 유아 하나 · 선조실록 25년 4월에 기사가 실린 날은 13·17·28·29·30일뿐입니다. 성이 무너지던 14·15·16일은 기사가 한 건도 없습니다 · 봉수는 작동했습니다. 다만 불빛으로는 배가 몇 척인지, 성이 함락됐는지를 전할 수 없었고, 사람이 달려 소식을 나르는 파발제는 1597년에야 생깁니다 · 동래성이 무너지던 그날, 전라좌수영은 이미 알고 그날 움직였습니다. 한양이 안 것은 이틀 뒤였습니다 · 나흘째 오후 장계가 닿자 조정은 그날 안에 이일과 신립을 임명합니다. 문제는 그 모든 조치가 "적 약 1만 명"이라는 스무 배 넘게 틀린 숫자 위에 서 있었다는 겁니다 · 이일은 군관 60여 명만 데리고 내려갔고, 상주에서 모은 병력은 창고 곡식으로 유인한 농민들이었습니다. 끝내 1,000명을 넘지 못했습니다 · 4월 30일 새벽 왕이 도성을 나서자, 백성이 가장 먼저 불태운 건 궁이 아니라 노비 문서가 있던 장예원과 형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