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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일까, 그 때의 나를 사랑한 것일까 '첫사랑'

엘리의 책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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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일까, 그 때의 나를 사랑한 것일까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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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의 책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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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블라디미르가 열여섯 살 여름을 보낸 그 별장이에요. [3] 온실 담은 반쯤 무너졌지만, 담장 아래에는 그 여름처럼 작은 회색 꽃이 피어 있어요. [3] 블라디미르는 그 여름을 공책에 다 적었지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3] 이제 작품을 바탕으로 상상한 만남을 이어 가려 해요. [3] 엘리가 이 마당에서 블라디미르를 만나, 그 여름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 봐요. [3] … [EntIMG,0:FL_102] [1] 블라디미르 씨, 여기가 그 별장이군요. [1] 담장 밑에 회색 꽃이 피어 있어서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어요. [EntIMG,0:FL_103] [2] 엘리 씨, 어서 오세요. 저도 아까 그 꽃 앞에 한참 서 있었어요. [2] 마흔 넘은 남자가 꽃 앞에서 얼굴이 빨개졌으니, 좀 우습지요? [1] 하나도 안 우스워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1] 오늘은 정원을 같이 걸으면서, 첫사랑이 블라디미르 씨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듣고 싶어요. [EntIMG,0:FL_104] [1] 먼저 이 담장 이야기부터 해 볼까요? [1] 여기서 지나이다를 처음 봤을 때, 무엇에 그렇게 마음을 빼앗겼어요? [EntIMG,0:FL_105] [2] 솔직히 저는 그 사람보다 그 장면에 먼저 반했어요. [2] 남자 넷이 이마를 내밀었고, 그녀는 꽃으로 그 이마를 톡톡 쳤어요. [2]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누군가에게 지는 일이 기쁠 수도 있다는 걸요. [2] 그리고 저도 그 줄에 서고 싶었어요. [EntIMG,0:FL_106] [1] 다음 날엔 두 팔로 실타래를 들고 있었다면서요? [2] 네, 한 시간 가까이 사람 실타래 걸이였지요. [2] 팔이 저렸는데도 그만하자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EntIMG,0:FL_107] [2] 지금 보면 저는 그 사람을 알아 가기보다, 그 사람 곁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1] 저도 열여섯 살 때 국어 선생님 글씨만 봐도 가슴이 뛰었어요. [1] 말 한마디 못 붙이고, 칠판 지우는 당번만 자청했지요. [2] 하하, 엘리 씨도 실타래 걸이셨군요. [EntIMG,0:FL_108] [1] 저 무너진 담이, 사랑한다면 뛰어내려 보라고 했던 그 온실 담이죠? [2] 네, 지금 보니 꽤 높네요. [EntIMG,0:FL_109] [2] 안 뛰면 제 사랑이 가짜가 될 것 같았어요. [2] 그래서 저는 사랑을 증명하려고 몸을 던졌어요. [2] 그녀가 제 얼굴에 입을 맞췄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요. [EntIMG,0:FL_110] [2] 그런데 다음 날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저를 대했어요. [2] 남자들을 줄 세워 놓고 놀리는 건, 솔직히 잔인한 놀이였어요. [1] 그런데 블라디미르 씨 목소리에는 원망이 별로 안 느껴져요. [EntIMG,0:FL_111] [2] 그 집 사정을 알고 나니 미워하기가 어렵더라고요. [2] 그녀는 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정작 기댈 사람은 없었어요. [2]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내려다보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고 했어요. [EntIMG,0:FL_112] [2] 그 말을 듣고 알았어요. 저는 처음부터 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없었던 거예요. [1] 아프지만 참 정직한 말이네요. [2] 그런데 웃긴 건요, 그걸 알고 나서도 다음 날 또 그 집에 갔다는 거예요. [1] 첫사랑은 원래 계산이 안 되잖아요. [EntIMG,0:FL_113] [1] 이 소나무 뒤가 그날 밤 숨어 있던 자리지요? [2] 네, 주머니칼까지 쥐고요. 그 작은 칼로 뭘 하려 했는지, 지금은 웃음만 나와요. [1] 그런데 나타난 사람이 아버지였어요. 그 순간 마음에 무엇이 먼저 왔어요? [EntIMG,0:FL_114] [2] 이상하게 화가 먼저 오지 않았어요. [2] 저는 아버지를 늘 우러러봤거든요. [2] 상대가 아버지라는 걸 안 순간, 질투보다 패배감이 훨씬 컸어요. [EntIMG,0:FL_115] [2] 그런데 그 패배감 안에는 이상한 자부심도 섞여 있었어요. [2] 그녀가 고른 사람이 제가 존경하는 아버지였으니까요. [2] 그것도 아버지를 닮고 싶던 아이의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1] 그때 어머니 생각도 하셨어요? [EntIMG,0:FL_116] [2] 부끄럽지만 그때는 못 했어요. 제 마음 아픈 것만 보였거든요. [2] 익명의 편지로 모든 걸 알았을 때, 어머니는 그 모욕을 혼자 견뎠어요. [2] 그 여름에 가장 크게 다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어머니였을 거예요. [EntIMG,0:FL_117] [1] 그 말씀 하시는 얼굴이 그 여름보다 훨씬 어른 같아요. [2] 마흔이 넘었는데, 그 정도는 철이 들어야지요. [EntIMG,0:FL_118] [1] 이제 가장 어려운 장면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1] 아버지가 채찍으로 내리친 팔에, 지나이다는 오히려 입을 맞췄지요. [1] 블라디미르 씨는 지금 그 장면을 어떻게 보세요? [EntIMG,0:FL_119] [2] 그때 저는 이게 사랑이구나, 이게 열정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2] 솔직히 무서우면서도 조금 부러웠어요. 저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다 걸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EntIMG,0:FL_120] [2] 그런데 지금은 그 장면이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아요. [2] 아버지는 가정이 있었고, 그녀는 기댈 데 없는 젊은 여자였어요. [2] 남에게 자신을 내주지 말라던 아버지가, 그녀에게는 다 내놓게 했어요. [2] 그건 공평한 사랑이 아니었어요. [1] 그래도 지나이다는 그 사랑을 스스로 골랐잖아요. [EntIMG,0:FL_121] [2] 맞아요. 그녀는 자기를 꺾을 만큼 강한 사람을 원했고, 그런 사람을 만났어요. [2] 그 선택을 제가 대신 판단할 수는 없어요. [2] 다만 그 대가를 그녀가 너무 혼자 치렀다는 게 마음이 아파요. [EntIMG,0:FL_122] [1] 아버지도 마지막 편지에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하라고 쓰셨지요. [2] 처음엔 그 말이 경고처럼 들렸는데, 지금은 고백처럼 들려요. [2] 아무에게도 붙잡히지 않을 것 같던 분이, 끝내 한 사람에게 붙잡혀 계셨던 거니까요. [1] 늘 강한 척하던 분이 마지막에 가장 솔직해지셨네요. [EntIMG,0:FL_123] [1] 4년 뒤에 지나이다를 찾아갔다가 한발 늦으셨지요. [1]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어요? [EntIMG,0:FL_124] [2] 미루던 제가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2] 젊을 때는 시간이 끝없이 있는 줄 알잖아요. [2] 그렇게 생기 넘치던 사람이, 제가 찾아가기 나흘 전에 조용히 떠났어요. [EntIMG,0:FL_125] [2] 그날 밤 저는 지나이다와 아버지, 그리고 저를 위해 기도했어요. [1] 그 기도에 블라디미르 씨 자신도 들어 있었네요. [EntIMG,0:FL_126] [2] 네. 제가 사랑한 건 어쩌면 지나이다 한 사람만이 아니었어요. [2]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그 여름의 저, 그 젊음까지 사랑했어요. [2] 그건 다시 오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반짝이는 것 같아요. [EntIMG,0:FL_127] [1] 오늘 들어 보니, 첫사랑은 누군가를 갖는 일보다 나를 처음 알게 되는 일이었네요. [1] 사랑 앞에서 지는 나,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의 아픔을 늦게 알아보는 나까지요. [2] 맞아요. 그 여름에 저는 처음으로 졌고, 처음으로 어른들의 마음을 봤어요. [EntIMG,0:FL_128] [1] 이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께도 묻고 싶어요. [1] 여러분의 첫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한 기억인가요, 아니면 그때의 나를 사랑한 기억인가요? [1] 그리고 그 사랑 곁에서, 그때 미처 보지 못한 사람은 없었나요? [EntIMG,0:FL_129] [2] 저 회색 꽃은 내년에도 피겠지요. [2] 저는 이 담장을 지날 때마다 열여섯 살 저에게 고맙다고 말할 것 같아요. [2] 그때 다 걸어 봤기에, 지금 사랑을 조금은 알게 됐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