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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장. 누가 믿게 되는가?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만나시다. 하.사.시. 성경공부. 전삼용 요셉 신부

순전한 가톨릭(전삼용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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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장. 누가 믿게 되는가?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만나시다. 하.사.시. 성경공부.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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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장. 벳사이다 베드로의 집에서.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만나시다 거짓이 없는 사람만 볼 수 있는 표징 세상에는 표징이 넘칩니다. 1330년 카시아의 성체는 피를 흘려 오늘도 그 두 쪽의 성무일도서가 남아 있고, 1879년에 죽은 베르나데트의 몸은 세 번 파헤쳐도 썩지 않아 지금도 느베르에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속에서 표징을 보지 못할까요. 요한 복음이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첫 조건을 적은 자리가 오늘 베드로의 텃밭입니다. 요한 복음 1장 47절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몸을 가린 잎이 무화과나무 잎이었습니다. 오늘은 왜 거짓이 눈을 가려 표징을 못 보게 하는지, 거짓 없는 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이 되는지 성경으로 깊이 봅니다. 마리아 발토르타의 『나에게 계시된 복음』 1권 제50장으로 들어갑니다. 베드로의 집부터 봅니다. "제 집은 가난합니다. 그러나 정직한 집이고 스승님께는 벗의 집입니다." 넓고 연기 낀 부엌, 마주 난 두 문으로 한쪽은 호수가, 다른 쪽은 무화과나무와 포도 덩굴의 텃밭이 보입니다. 빵과 올리브를 내오자 예수님은 "네가 사랑으로 나에게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시며 더 좋은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정직한 집이 그분을 맞아들이니 그 집이 오늘 하늘이 열리는 자리가 됩니다. 요한 복음 14장 23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코린토 1서 3장 16절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 성전이 됩니다. 옥상에서 오래 기도하시고 호숫가 아이들과 어울리신 뒤 필립보를 부르시며 "너는 올바른 지향을 지닌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나를 드러낸다" 하십니다. 드러내심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벗에게 논쟁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보시오." 표징은 다가가는 이에게만 보입니다. 다음은 무화과나무 아래의 나타나엘입니다. 요한 복음 1장 48절입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왜 하필 무화과나무입니까. 사람이 처음 거짓을 배운 날로 돌아가십시오. 창세기 3장 7절입니다.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맨 먼저 한 일이 가림이고, 그 가리개가 무화과나무 잎이었으며, 그다음이 숨음과 남 탓이었습니다. 라삐들의 전승은 그래서 에덴의 그 나무를 무화과나무로 보기도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사람이 저를 가린 첫 자리이고, 나타나엘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야곱의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창세기 27장 35절대로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챈 사람이었고, 거짓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란 야곱의 속임수는 벗고 이스라엘만 남은 사람입니다. 49회차의 시몬이 제 죄를 드러내어 솔직했다면 나타나엘은 드러낼 가리개가 없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왜 그분 앞에서 거짓이 소용없는가입니다. 나타나엘이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 그 답입니다. 요한 복음 2장 25절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히브리서 4장 13절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무화과 잎은 사람 눈만 가릴 뿐 그분 눈은 가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가리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거짓은 나를 내 주인으로 세우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나를 옳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 16장 15절입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스스로 의롭다는 사람은 하늘에서 온 사람에게 순종할 수 없고, 순종할 수 없으니 그를 하늘의 사람으로 알아보는 표징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 12장 37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표징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카시아의 피와 베르나데트의 몸 앞에서도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까닭이 이것입니다. 보면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멧돼지와 양입니다. 이사야가 가리는 사람의 몸을 그렸습니다. 이사야 1장 6절입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데라곤 없이 상처와 상흔 새로 맞은 자국뿐인데 짜내지도 싸매지도 못하고 기름을 바르지도 못하였구나." 정글의 멧돼지는 발에 가시가 박혀 곪아도 절뚝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절뚝이면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저를 가리는 사람이 그 짐승입니다. 정글에서 혼자 살아남는 법은 알지만 동산이 있음을 알기를 거부합니다. 창세기 3장 23절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반면 가축은 아프면 아프다는 표를 냅니다. 그래야 주인이 고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장 3절입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요한 복음 10장 4절입니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주인을 인정하는 것이고, 주인을 인정하는 것이 순종이며, 순종하는 이만이 표징을 봅니다. 가리는 데 익숙한 사람은 양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래서 정글에서 혼자 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가린 사람을 벌하신 뒤에도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무화과 잎은 시들고 하느님이 입혀 주시는 옷은 남습니다. 다음은 사다리와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거짓 없는 이에게 약속하십니다. 요한 복음 1장 51절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표징이란 이것입니다. 사람으로 보이는 분 위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 곧 사람이신 분을 하늘의 은총을 받는 분으로 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베텔에서 그 사다리를 보고 한 말이 있습니다. 창세기 28장 17절입니다.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이고, 사다리가 선 곳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그러니 사다리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집, 곧 성전이 됩니다. 나타나엘이 "저는 그토록 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자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그러면 하늘에 합당하게 되리라" 하십니다. 저녁 옥상 강론에서 예수님은 법을 "줄기 위에 갓 핀 장미"라 하시고 라삐들의 무거운 규정 대신 두 계명만 남기십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사랑이 여러분에게 사다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야곱이 보았던 그 사다리처럼." 이사야 51장 3절입니다. "그 광야를 에덴처럼, 그 황무지를 주님의 동산처럼 만드시니." 정글에서 동산으로 돌아가는 길이 사다리이고, 그 길의 첫 계단이 거짓 없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보라,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내 안의 사람은 샘에서 물을 긷듯 빛에서 힘을 길어 와야 한다. 그 길어 옴이 기도다." 교회의 판단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56항은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기적, 예언, 교회의 전파와 거룩함과 지속성이 하느님 계시의 확실한 표징이며 모든 이의 이해력에 맞는 신빙성의 동기라고 가르치고, 2468항은 진실성이 말과 행동에서 참되고 이중성과 위장과 위선을 피하는 덕이라고 가르칩니다. 표징은 넉넉하고, 모자란 것은 진실성입니다. 1330년 이탈리아 시에나 근처, 한 사제가 죽어 가는 이에게 성체를 모시고 가면서 성합 대신 제 성무일도서 갈피에 성체를 끼워 넣었습니다. 감추어 다니려는 편의였습니다. 병자의 집에서 책을 펴자 성체가 피를 흘려 두 쪽을 붉게 적셨고, 놀란 사제는 복자 시모네 피다티에게 고백했으며, 그 두 쪽은 지금도 한 쪽은 카시아의 성녀 리타 대성당에, 한 쪽은 페루자에 모셔져 있습니다. 감추어진 성체가 스스로를 드러낸 표징 앞에서 그 사제는 가리기를 그쳤습니다. 그런데도 못 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보면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스스로를 옳게 만들려고 가리고 있는 것 하나를 하느님 앞에 그대로 내놓으십시오. "주님, 여기가 곪았습니다." 양이 주인에게 상처를 보이는 그 말이 무화과 잎을 벗는 첫걸음이고, 그 뒤에야 표징이 보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거짓은 나를 내 주인으로 세워 하늘의 사람에게 순종하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표징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무화과 잎을 벗은 사람만이 사다리를 보고, 사다리이신 분을 맞아들여 성전이 됩니다. 다음 회차 제51장 '마리아께서 유다 타대오를 보내시어 예수님을 카나의 혼인 잔치에 청하시다'에서는 사촌 유다가 전하는 집안의 걱정과, 땅에서 오는 소리와 위에서 오는 소리 사이에서 싸우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