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니의 시간- 영원한 현재
God Is So Good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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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니의 시간- 영원한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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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원한 현재
부제: 삼층천의 시각으로 보게 하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경험으로 과연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찬양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는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는 순간마다 사라지며,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선택이 내일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며, 처음부터 마지막을 아시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시편 90:2–4, 이사야 46:9–10).
이 찬양은 바로 그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에서 논쟁해 온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묵상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적도에서 시속 약 1,670킬로미터로 자전하고, 태양 주위를 시속 약 107,000킬로미터로 공전합니다. 태양계 역시 은하 중심을 기준으로 시속 약 828,000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이며, 은하를 한 바퀴 도는 데 약 2억 3천만 년이 걸립니다. 이러한 수치는 서로 다른 기준에서 측정한 과학적 근삿값입니다.
이처럼 정교한 운동을 이어가는 별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하들이 광활한 우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장엄한 광경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말씀합니다(시편 19:1).
이토록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창조 세계를 붙드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작은 지식과 경험만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 이후 인간은 자신의 지성과 지식, 경험과 논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까지 판단하려는 교만에 빠지곤 합니다.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만 바라보는 것 역시 때로는 인간이 경험하는 직선적인 시간과 제한된 인식의 틀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과 동일한 시간의 제약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면, 우리가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두 개념도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안에서는 함께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찬양은 오랜 신학적 논쟁을 단순히 부정하려는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실제적인 선택 및 책임이 어떻게 함께 존재할 수 있는지를 하나님의 영원하심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순서대로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아시며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 찬양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실제적인 선택과 그 결과를 아실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가능한 길과 거기에서 비롯될 결과들까지 자신의 전능하신 지혜와 주권 안에서 다스리신다는 신학적 묵상입니다.
한 인간의 선택은 또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은 다시 헤아릴 수 없는 사건과 결과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의 작은 결정이 가정과 공동체, 민족과 역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경우의 수는 수조를 넘어 수경에 이르러도 다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는 그러한 가능성과 실제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그분의 주권을 벗어나는 통제 불가능한 혼돈이 아니라는 것이 이 찬양의 중심 고백입니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모든 악한 선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거나 직접 죄를 짓도록 강제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책임을 집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다스리시고, 인간은 실제로 선택하며 책임을 진다.
우리가 인간의 시간과 논리만으로 이 두 사실의 관계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곧바로 모순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앞에서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겸손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2에서 셋째 하늘, 곧 삼층천을 언급합니다.
이 찬양에서 《삼층천의 시각》이란 인간이 땅에서 바라보는 제한된 시각을 넘어 하나님의 영원한 관점에서 역사와 선택을 바라보고 싶다는 신앙적 소망을 담은 표현입니다. 성경이 삼층천에서 모든 가능한 역사를 관찰하는 방법을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표현에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를 바라보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수많은 선택과 사건들이 때로 혼돈과 무질서처럼 보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예상하지 못한 결과, 인간의 악한 선택까지 뒤섞인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을 해하려 했던 형들에게 그들은 악을 계획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이루셨다고 고백했습니다(창세기 50:20).
인간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무너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모든 고난의 이유를 즉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실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구합니다.
이 찬양의 마지막은 신학적 논쟁에서 누가 옳은지를 증명하려는 선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이 완성되었다는 자랑도 아닙니다. 오히려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분의 지혜를 구하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나의 지식으로 주를 판단하지 않고, 주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리.”
“삼층천의 시각으로 보게 하소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는 그 은혜 가운데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는 이러한 신앙의 고백을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깊이 있는 남성 보컬, 마지막에 확장되는 합창을 통해 표현한 시네마틱 심포닉 워십 발라드입니다.
광활한 우주의 장엄함을 표현하는 선율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교만과 한계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영원한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묵상한 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이 찬양을 듣는 모든 이가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외하고, 자신의 지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며, 매 순간 주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기를 소망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소서. 인간의 시간과 지식에 갇혀 주님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수없이 많은 선택과 복잡한 역사 속에서도 주님의 영원한 지혜와 섭리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허락하소서.
우리에게는 혼돈처럼 보이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의 손에 우리의 삶을 맡기게 하소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 시편 90: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