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항구 이영진 노래 김영수 작사 이재호 작곡 (1941 백년설)7080 삼태기 메들리 이영진 LIVE 카페 (서울시영등포구디지털로407(대림동)K-ARIRANG李咏陳歌謠博物館
삼태기 이영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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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항구 이영진 노래 김영수 작사 이재호 작곡 (1941 백년설)7080 삼태기 메들리 이영진 LIVE 카페 (서울시영등포구디지털로407(대림동)K-ARIRANG李咏陳歌謠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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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地의 港口 (1941 백년설)
이영진 노래 김영수 작사 이재호 작곡
1.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밑에
말을 매는 나그네야 해가 졌는냐
쉬지말고 쉬지를 말고 달빛에 길을 물어
꿈에 어리는 꿈에 어리는 항구 찾아 가거라
2.흐르는 주마등 동서라 남북
피리부는 나그네야 봄이 왔느냐
쉬지말고 쉬지를 말고 꽃잡고 길을 물어
물에 어리는 물에 어리는 항구 찾아 가거라
3.구름도 낯설은 영을 넘어서
정처없는 단봇짐에 꽃비가 온다
쉬지말고 쉬지를 말고 바람을 앞세우고
유자꽃 피는 유자꽃 피는 항구 찾아 가거라
백년설(白年雪 본명 李昌民) 1914년 1월 19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출생
1934년에 우연한 기회로써 가수로 첫 데뷔
1939년 일본에서 〈유랑극단〉을 취입하여 가수로 정식 데뷔
1980년 12월 6일(66세) 별세
1941년 개봉한 영화 ‘복지만리(福地萬里)’의 주제가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가수. 본명은 원래 이갑룡(李甲龍)이었지만, 늘 이창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결국 1964년에 정식으로 개명했다
1950년대에 작사가로 활동할 때엔 향노(鄕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대표곡
1939년 유랑극단
1939년 두견화 사랑
1939년 일자일루
1940년 나그네 설움
1940년 번지없는 주막
1940년 산 팔자 물 팔자
1940년 남포불 역사
1940년 눈물의 수박등
1940년 어머님 사랑
1941년 고향 길 부모 길
1941년 대지의 항구
1941년 석유등 길손
1941년 복지만리 - 처음 복지만리가 나왔을때에는 3절이 일본어였던 점에서 3절 가사를 바꿨으나, 2000년대 이후부터 방송사 내부 규정으로 사실상 방송 금지곡이 되었다
1941년 만포선(진) 길손
1942년 고향설
1942년 경기 나그네
1942년 아주까리 수첩
1943년 고향 소식
1943년 알성급제(알쌍급제)
1944년 추억의 수평선 - 1944년에 마지막으로 일제 때 발매된 음반이다
8.15 광복 이전의 작품이 현재 80여 곡가량 확인되고 있다
남인수와 같은 시대에 그와 쌍벽을 이루는 인기를 누렸다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가수. 본명은 원래 이갑룡(李甲龍)이었지만, 늘 이창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결국 1964년에 정식으로 개명했다. 1950년대에 작사가로 활동할 때엔 향노(鄕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8.15 광복 이전의 작품이 현재 80여 곡가량 확인되고 있다. 남인수와 같은 시대에 그와 쌍벽을 이루는 인기를 누렸다.
2. 白年雪
1914년 5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414번지에서 아버지 이형순(李瀅淳, 1887. 6. 20 ~ 1948. 5. 19)과 어머니 김차악(1887. 4. 15 ~ 1918. 8. 3)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10]으로 태어났다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8년에 졸업했다
1929년 성주농업보습학교(現 성주고등학교)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이후 경성으로 가서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한양부기학교를 졸업한 백년설은 애당초 가수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고, 원래 시와 희곡을 쓰며 문학의 포부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23세 때에 테너 안기영으로부터 시에 소질이 있음을 인정받아, 1936~1937년 무렵부터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작사 활동을 하게 된다
그 무렵부터 여러 작사가, 가수들과 친분을 쌓았다
1938년 12월, 백년설은 자신이 공부하고 싶었던 문학을 배우기 위해 태평레코드사의 문예부장 박영호 일행과 합류되어 일본에서 가요 「유랑극단」를 시험삼아 취입하게 되었다
이 가요는 다음해인 1939년 1월에 발매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그는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태평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백의민족의 기상을 지니고 싶다는 꿈과 포부를 담아 스스로 예명을 '백년설'이라 붙였다
1940년에는 뒷날 그의 대표곡이 되는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등을 발표하면서 남인수와 함께 당대의 대표적인 가수로 등장하게 된다
이때 나온 '번지 없는 주막', '만포선 길손'등이 나온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요곡','대중가요'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백년설은 자신이 소속된 태평레코드가 운영난으로 인해 불안정 해지자, 1941년 12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 오케레코드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고향설」(1942), 「아주까리 수첩」(1942) 외에는 큰 인기곡을 낳지 못하였다
그의 대표곡 대부분 「두견화 사랑」 「일자일루」 「나그네 설움」 「어머님 사랑」 「산 팔자 물 팔자」 「번지 없는 주막」 「만포선 길손」 「비 오는 해관」 등은 태평레코드사에서 탄생된 것 들이다
백년설은 1945년 9월, 대구에서 [봉화가극단]을 조직하여 연극 「깃발 날리던 날」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해방 후 최초로 공연된 연극이다. 이듬해에는 김해송이 이끄는 유명한 KPK악극단에 특별출연하기도 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6·25 전쟁 후에는 가수로 활동하기 보단 목재사업, 고아원 운영과 같은 자선사업에 몰두하였고, 경향신문 동경지사를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사업 활동은 그의 본령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 이후에도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하였으나, 이전보다는 가수 활동이 부진했다
1953년에는 서라벌레코드사 설립, 1956년에는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감사, 평화신문사의 사업국장, 1958년에는 센츄리레코드사 문예부장 등 사업에도 관여, 백민영화사 창설, 한국가수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1963년에는 한국연예단장협회장을 지냈다
1963년 7월에 은퇴공연을 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을 끝냈다
1970년대 중반에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지만 극적으로 회복했다
1978년 9월 백년설은 자녀들의 초청으로 아내 심연옥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생활하다가 식도암으로 1980년 12월 6일 향년 66세로 사망했다
사후 성주 성밖숲에 있는 그의 노래비와 그의 모교 교정에 흉상과 노래비가 세워졌다
2002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2.1. 일제강점기 활동
백년설은 본래 독립투사로 옥사한 형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성주농업보습학교 시절 일본인 교사가 급우를 폭행한 데 항의해 동맹 휴학을 주동하다 일경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 등 항일 의식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히트곡인 '나그네 설움'과 '번지없는 주막'의 가사가 '망국의 한'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가 엄청난 고문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지방공연 때는 형사들이 동행할 정도로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백년설은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복지만리’ 등을 유행시키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고,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일제는 그를 침략전쟁의 선전에 이용했다
백년설은 1943년 군국가요 혈서지원을 불렀다
2008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지만 이후에 그의 이름은 친일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심의 기각 결정의 배경은 "첫째, 단체 소속인 전속가수의 경우 소속 단체의 요구를 뿌리치기가 어렵고, 둘째, 이창민(백년설)은 대중음악 가수로 ‘혈서지원’ 등 군국가요를 부른 사실과 기타 친일행위가 인정되기는 하지만, 당시 대중가수가 지니는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점이 참고돼 기각한다"고 했다. (출처: 백세시대)
백년설이 활동하던 오케레코드도 비록 설립자인 이철이 일제 자본으로 큰 것은 사실이나 그 역사를 보면, 일본인 앞에선 '을'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백년설이 군국가요를 녹음했을 때는 왜정 말기로, 이철이 권한을 잃고 일제의 강압에 따라 이리저리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소속 가수들은 '을'도 못되는 '병', '정'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백년설이 순수히 자신의 의지로 일제를 옹호하는 노래를 불렀다기보다는 일제의 압력에서 어쩔 수 없이 불렀다고 보는 것이 위 민족문제연구소의 삭제 사유인 것
3. 여담
1980년대에 건설부장관, 내무부장관, 대구직할시장을 역임하였던 성주군 출신의 이상희 전 장관이 한때 백사모 (백년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장을 맡으며, 백년설의 인생을 알아보기 위해 전국에 있는 백씨의 지인들 수십 명을 직접 만났다
그의 인생경험과 철학, 가치관들을 알게 된 그는 백년설이란 인물에 대한 깊은 감동을 받고, 그가 한때 일제강점기 시절에 불렀던 일본 군가 때문에, 그의 인생전체가 친일파로 매도되고 있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를 개탄하고 그의 인생을 재조명해서 《오늘도 걷는다마는》이라는 그의 전기를 집필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고향인 성주군에서 전국노래자랑이 개최될 때마다 백년설이 언급된다
생애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여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다
1934년에 우연한 기회로써 가수로 첫 데뷔한 그는 1938년 일본에서 〈유랑극단〉을 취입하여 가수로 정식 데뷔하였고, 1939년까지도 〈두견화 사랑〉, 〈마도로스 수기〉 등을 연속 히트시켰다
1940년 이후 오랫동안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이며, 이 밖에도 〈삼각산 손님〉, 〈고향 길 부모길〉, 〈남포불 역사〉, 〈눈물의 백년화〉, 〈산팔자 물팔자〉, 〈천리정처〉, 〈아주까리 수첩〉 등 수많은 애창곡을 남겼다
〈유랑극단〉과 관련된 그의 일화로, 이 곡을 받아 처음으로 연습을 할 때도, 원래 가사는 단지 1소절만 있었는데,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활용하여 즉석에서 가사를 완성하고, 노래연습을 마쳐 취입을 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독보적인 가수의 행보를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40년대를 대표하는 남자 가수로 활동하였다
백년설은 음정을 흔들어 구수하면서도 듣는이에게 절규하는 듯한 독창적인 호소력이 특징이다
고향 성주에 생가가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건물로 대체되었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의 전기로는 내무부장관과 건설부장관을 역임한 이상희가 저술한 [오늘도 걷는다마는]이 있으며, 그의 파란만장하고 감동적인 삶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
이 곡은 같은 해 1941년 개봉한 영화 ‘복지만리’의 주제가이기도 합니다